영의정 남편의
수염을 몽땅 뽑고
당당히 사약을 받다
- 조선 최고의 여장부 송씨 -
조선 시대 여성이 가장 고통을 받은 것은 일부다처제에서 비롯된 축첩의 문제였다.
얼굴도 보지 못하고 부모의 결정에 따라 혼례를 올린 뒤 막상 정을 붙이고 살려니까 남편은 이런저런 이유로 첩을 들이고, 집 안에서 거느리는 여종까지 친압(親押, 겁탈)하여 성의 노리개로 삼았다.
그러나 여자는 항의도, 반발도 할 수 없었는데 투기를 하면 칠거지악이라고 하여 시집에서 쫓아내니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인내해야 했다.
여자를 꽁꽁 묶은 올가미는 칠거지악 외에도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삼종지도가 있었지만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조선의 뭇여성들이 축첩 문제로 고통 받을 때 당당하게 여성의 권리를 내세우면서 정체성을 찾으려고 한 여성들도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어우동이나 유감동은 성적인 부분에서 당당했다.
고종 말년이 되면 여성이 일부다처제 폐지를 요구하며 임금도 후궁을 두지 말라고 시위를 벌이는 촌극까지 빚어진다.
이에 대해 완고한 유림은 왕실에 후손이 끊기면 나라가 망한다며 축첩 반대 운동을 벌이는 여성들을 비난했다.
중종 때의 명신 홍언필의 부인 송씨 또한 그런 여성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녀는 처녀 때부터 당당하게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다.
부친 송질이 평안도관찰사와 영의정을 지내는 등 명문가 규수였기에 부유하고 귀하게 자랐으나, 여자라고 해도 불합리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송 씨가 규수 때 마을에 질투심 많은 여인이 있었는데 남편이 몇 번 야단을 쳤으나 고쳐지지 않자 그는 아내의 손목을 잘라서 마을 사람들에게 보이며 경계를 삼도록 했다.
질투심이 많다고 손목을 자르는 것은 처참하고 잔혹한 일이었기 때문에마을이 그 일로 발칵 뒤집혔다.
“투기를 하는 계집의 손목을 자른 것은 통쾌한 일이다. 장부의기상이 있다."
남자들은 부인의 손목을 자른 남자에게 혀를 내두르면서도 칭송했다.
"장부의 기상이 여자를 괴롭히는 것인가? 저희가 누구에게서 태어났는가?"
손목을 자른 이야기를 듣게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라 몸을 떨었는데 송 씨는 그 이야기를 듣고 분개했다.
그녀는 여종을 시켜 잘린 손목을 가져오게 한 뒤 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그대는 여자기 때문에 죽음을 당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송씨는 손목을 잘린 여인이 여자기 때문에 그런 비극을 당했다고 생각했고, 송 씨가 술을 따르고 조문을 하자 해괴한 짓을 한다고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송 씨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는데 송 씨가 잘린 손목을 놓고 제사를 지낸 것은 남자들에 대한 항변이자 도전이었다.
남자들은 송씨를 사나운 여인이라고 비난했으나 여자들은 모두 통쾌하게 생각했다.
"규수가 그리 사나워서 어찌 시집을 간단 말이냐?"
송 씨의 아버지 성질이 혀를 찼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짚신도 짝이 있다는데 사지육신 멀쩡한 제가 시집을 못 가겠어요?"
송 씨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송 씨의 사나운 성품 때문에 시집갈 나이가 되어도 청혼하려는 남자들이 없었다.
"성품이 칼날 같지만 여사(女士)라고 부를 만하지 않은가? 의기가 있으니 집안을 잘 이끌 것이다.”
신진 사대부로 명성을 떨치던 홍언필은 송 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떤 여인인지 궁금해했고,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니 송 씨가 성품이 강직하고 절색이라고 했다.
혈기 있는 청년 홍언필은 송씨에게 청혼을 했는데 그의 집안 또한 당대의 명문가였기에 혼사는 쉽게 이루어졌다.
홍언필은 신부의 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꿈같은 첫날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홍언필은 여종이 술상을 들여오자 신부가 어떻게 하는지 보기 위해 슬그머니 여종의 손을 잡았는데 순간 신부의 아름다운 얼굴이 무섭게 변하더니 며칠이 지나자 신부가 여종의 손목을 잘라서 홍언필에게 바쳤다.
"이런 사나운 계집이 있나? 아무리 종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찌 산사람 손목을 자를 수가 있나?"
홍언필은 버럭 화를 내면서 본가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품이 사나운 송씨는 신혼의 달콤함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소박을 맞았다.
“새색시를 옆에 두고 다른 계집의 손을 잡은 신랑도 잘한 것은 아니야."
송 씨는 분해서 씩씩거렸으나, 본가로 가버린 신랑을 어찌할 수가 없었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 돌아오려니 했는데, 홍언필은 꽃다운 끝까지 신부를 외면했다.
신랑은 본가로 돌아간 뒤 처가와도 완전히 발길을 끊어버렸고 송 씨는 난처한 입장에 빠지고 말았다.
신랑에게 소박맞았으니 혼자서 시가에 찾아갈 수도 없고, 혼인을 한 몸으로서 친정에서 마냥 지낼 수도 없었다.
즐거워야 할 신혼이 지옥으로 변하였으며 송씨는 하루하루 적막한 날을 보냈다.
송 씨는 뒤늦게 후회하며 낭군을 기다렸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홍언필은 찾아오지 않았다.
홍언필은 송 씨와 헤어진 뒤 학문에 더욱 정진하여 중종 2년 증광시에서 을과 장원급제를 했다.
그는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광대와 춤추는 무리를 앞세워 삼현육각을 울리며 삼일유가(三日遊街)를 돌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홍언필의 삼일유가를 보며 기뻐했으나, 소박맞은 송 씨는 즐거울 수가 없었다.
비록 혼례를 올려 남편이라고는 하지만 소박맞은 처지니 반길 수도, 만날 수도 없었다.
홍언필은 삼일유가를 돌면서 처가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는데 장인 송질이 실망한 것은 물론이고 그녀도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홍언필이 야속하고 자신의 성품이 사나운 것을 후회했다.
"네 성질이 그토록 사나우니 신랑이 어떻게 너를 귀애하겠니?
신랑의 사랑을 받으려면 못된 성질을 죽여라.”
송질의 부인이 딸에게 말했다.
"저도 성격이 사나운 것은 알지만 신랑도 잘한 것은 없어요.”
송 씨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세상이 남성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래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누군들 이치를 몰라서 지겠느냐?"
“어머니, 저는 어떻게 해야 해요?”
송씨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물었다.
조선 시대니 이혼이나 개가를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다시는 신랑 앞에서 사나운 행동을 하지 말아야지."
송 씨는 마음속으로 수긍하지 않았으나 제도와 현실이 그러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이제 신랑 앞에서 요조숙녀가 될게요. 그러니 신랑이 돌아오게 해 주세요."
"진심이냐?"
“네, 맹세할 수 있어요."
송질의 부인은 딸이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을 알고 송질에게 이야기했고, 송질도 딸과 사위가 원만하게 지내기를 바라 홍언필을 불러 화해할 것을 권고했고, 이에 홍언필이 마지못한 체 송 씨를 맞아들였다.
친정아버지와 남편, 아들이 영의정을 지낸 일은 조선 역사에 없던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면서 칭송
했다.
“송 씨가 성품이 사나워도 가정을 잘 꾸린다고 하더군."
"사나운 성품을 고치니 남편과 아들이 모두 영의정을 지낸 거야."
사람들이 송 씨를 칭송했다.
친정아버지에 이어 남편과 아들이 차례로 영의정을 지낸 것은 본인들의 자질이 뛰어나기도 했으나 송 씨의 역할 또한 적지 않았다.
그녀는 홍언필과 재결합한 뒤 현모양처가 되었다. 잘린 손목을 놓고 제사를 지낼 정도로 당찬 여자니 남편을 받들고 아들을 교육하는 일에 남다른 정성을 쏟지 않았겠는가.
또 송질과 홍언필, 홍섬 등 세 사람이 모두 평안도관찰사를 지내 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평안도는 부와 여자가 넘치는 고장으로 색향이라고도 불렀다.
송 씨가 규수일 때 평안도관찰사인 아버지를 따라 정원에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이 나무가 자라서 꽃이 필 때면 나도 시집을 가겠지.
내 신랑 될 사람은 누구일까?'
송 씨는 복숭아나무를 심고 신랑이 될 사람을 생각하면서 살며시 얼굴을 붉혔는데 과연 복숭아나무가 자라서 꽃이 만개하자 그녀는 홍언필에게 시집을 갔다.
여러 해가 지나 홍언필이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송씨는 정원의 복숭아나무를 보았다.
'내가 심은 복숭아나무에 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렸구나.'
중년 부인이 된 송씨는 탐스러운 복숭아를 먹으며 감회에 젖었다.
다시 여러 해가 흘러 홍언필이 늙어 벼슬에서 물러나고 그의 아들이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송씨는 이번에는 대부인이 되어 평양으로 거처를 옮겼고, 복숭아나무는 어느새 노쇠하여 말라갔다.
'이 나무를 심고 꽃이 핀 것을 본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쇠락하는구나'
송 씨는 복숭아나무 밑에서 더위를 피하며 지난 세월을 금성읍류(金城泣柳,집안이 쇠락해 눈물을 흘리며 한탄하는 것)했다.
송씨는 남편에게 소박맞은 뒤 매사에 신중했고 홍언필의 말을 잘 들었다.
혼례를 올린 지 30년이 지나자 홍언필은 재상이 되었는데 그는 30여 년 동안 부인 앞에서 근엄한 표정을 지을 뿐 웃지 않아 송 씨가 항상 부담을 가지고 조심했다.
"부인의 사나운 성품을 누르기 위해 내가 일부러 웃지 않았소.
부인은 그것도 모르고 항상 쩔쩔맸으니 우습기 짝이 없구려."
하루는 홍언필이 부인을 옆에 앉혀놓고 웃으면서 지난 이야기를 했다.
홍언필의 말을 들은 송 씨는 대노했다.
"당신이 어찌 30년 동안이나 나를 속일 수 있소?"
송 씨의 수십 년간 참고 있던 성미가 폭발해 버렸고 그녀는 홍언필의 보기 좋은 수염을 모조리 뽑아버렸다.
이튿날 홍언필이 조정에 나가자 대신들이 모두 웅성거렸고, 중종이 의아하여 물었다.
“경의 탐스러운 수염은 어찌했는가?"
중종의 하문에 대신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고 그에 반해 수염을 뽑힌 홍언필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홍언필은 머리를 조아리고 부인에게 당한 이야기를 아뢰었다.
“부인네의 성품이 그토록 사나우니 용서할 수가 없다."
사정을 듣게 된 중종은 화를 버럭 내고 송 씨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지시했고, 내시가 사약을 받들고 부리나케 홍언필의 집으로 달려갔다.
“송 씨는 어명을 받들라."
내시가 목청을 높여 소리 지르자 송 씨가 마당에 나와 거적을 깔고 머리를 조아렸다.
"송 씨는 성품이 사나워 남편의 수염을 모두 뽑았으니 부인의도리를 잃은 것이다.
이에 사약을 내린다."
내시가 사약을 상 위에 놓자 송씨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릇을 들어 벌컥벌컥 마셔버렸고, 그 모습을 본 내시가 경악을 하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탄식했다.
그러나 중종이 내린 것은 사약이 아니라 꿀물이었는데 송 씨의 사나운 성품을 고치기 위해 사약이라 말하고, 울며불며 매달리면 그때 용서해주려고 한 것이다.
“정말 사나운 부인이로다"
중종은 내시에게 이야기를 듣고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송 씨가 우연한 기회에 독서당에 갔을 때 임금이 하사한 아름다운 옥배(玉杯)가 있었다.
"이것은 임금께서 하사하신 것이니 선생만 만질 수 있습니다."
독서당 관리의 부인이 송 씨에게 말했다.
"나의 아버님과 남편, 아들이 모두 영의정을 지냈는데 내가 이것을 못 만지겠느냐?"
송 씨는 눈도 깜박하지 않고 옥배를 만지고 감상했다.
송 씨가 죽을 때 94세였고, 80세가 넘은 아들 홍섬이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마쳤다.
다음은 노수신이 홍섬을 축하하여 지은 시인데 부모가 장수하는 것은 아들이 효자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세 사람이 모두 정승이 되었으니
三從不出相門闡
이런 일은 아직까지 처음 보았도다
此事於今始見之
다시 성중의 영수장을 짚고
更拄省中靈壽杖
또 어머님 앞에서 노래자의 색동옷을 입었구나
却被堂上老來衣
서유영(徐有英)이 금계필담(錦溪筆談)에 이 이야기를 수록한 것은 송 씨의 사나운 성품과 홍언필 일가의 부귀를 다루려 함이나, 조선 시대 많은 여성들은 이 이야기에서 통쾌함을 느꼈다.
여인으로서 사회적인 제약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을 뿐 아니라 남편과 아들을 영의정까지 출세시킨 그녀는 여인 중에 쾌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