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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라고 배째!! 조선의 취옹화사(醉翁畵師) 김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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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도> 김명국, 17세기, 종이에 수묵


악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악귀다

ㅡ 취옹화사 김명국 ㅡ

조선 시대 가장 널리 이름이 알려지고 높이 평가받은 화가는 신필(神筆)로 불리는 김명국(金明國)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처럼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대중에게는 낯익은 이름이 아니다.

그의 그림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달마도>고 그밖에 <기려도> <탐매도> <설경산수도〉 <사시팔경도> 등이 남아 있다.

<탐매도>는 매화를 감상한 그림이며 <사시팔경도 >는 조선의 아름다운 사철 풍경을 담은 것으로 모두 8폭이다.

김명국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中 초춘(初春),

 

김명국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中 만춘(晩春)

 

김명국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中 초하(初夏)

 

김명국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中 만하(晩夏)

 

김명국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中 초추(初秋)

 

김명국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中 만추(晩秋)

 

김명국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中 초동(初冬)

 

김명국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中 만동(晩冬)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이른 봄의 풍경 '조춘', 늦은 봄의 풍경 '만춘' 첫여름의 풍경 '조하', 늦여름의 풍경 '하'뿐이고 가을과 겨울을 그린 4폭은 전해지지 않는다.

<사시팔경도>는 1662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특히 휘늘어진 버들가지 아래 작은 정자와 강물에 떠 있는 배 한 척, 뒤의 산 풍경이 흡사 세외선경(世外仙境)을 그린 듯, 꿈속의 풍경인 듯 환상적이다.

김명국은 선조 33년에 태어나 광해군과 인조 때 활약한 화원으로서 도화서(圖畵署, 조선 시대 그림을 맡아보던 관청 교수)를 지냈으며, 인물화와 산수화를 잘 그려 신필로 널리 알려졌다.

조선 시대 화원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도 술을 좋아하여 사람들은 그를 취옹(醉翁)이라고 부렀는데 김명국은 그 별명을 좋아하여 나중에 자신의 호로 삼았다.

오원 장승업의 ‘고사인물도’


조선의 화가는 삼원(三園,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과 삼재(三齋,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가 유명한데, 평생을 술과 광기로 산 김명국은 최북, 장승업과 함께 조선 시대 세 미치광이(三 狂) 화원으로 불렸다.

신필로 일컬어지는 김명국에게 그림을 부탁하는 사람은 반드시 술을 가져가야 그림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일반인 뿐만 아니라 사대부도 마찬가지였는데 하루는 그의 빼어난 화격(畫格)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영남에서 중 하나가 찾아왔다.

"선생의 말씀을 영남에서도 익히 들었습니다.
부디 소승을
위하여 명사도 한 폭을 그려주십시오."


명사도(冥司圖)


중은 김명국에게 명사도(冥司圖)를 그려달라고 부탁하면서 포목 수천필을 사례로 바쳤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사도란 죽은 사람이 저승으로 갈 때 명부전에서 십왕에게 재판을 받고 지옥이나 극락으로 보내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알았으니 돌아가 기다리시오."

김명국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중이 돌아가자 그는 포목을 하인들에게 들리고 기루로 가서 몇 달 동안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 놀았다.

"포목을 수천 필이나 주었는데 어찌 그림을 그리지 않고 술만 마시는 것이오?"

김명국이 몇 달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자 화가 난 중이 찾아와 항의했다.

“그림이 붓만 잡으면 아무렇게나 그리는 것인 줄 아시오?
영감이 떠올라야 그릴 것이니 기다리시오."


김명국은 중의 재촉에도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취옹화사 김명국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탐매도>. 모든 생명이 잠든 한겨울 추위에도 고아하게 핀 매화를 옛 사람들은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했다. 그리하여 선비들은 찬바람이 가시지않은 눈길을 밟아 탐매의 길을 나섰다.


다시 여러 달이 지난 어느 날, 김명국은 취흥이 도도해지자 붓을 잡아 휘갈기기 시작해 한 번 붓을 잡아 휘두르자 신들린 듯이 손이 움직여 화폭에 집이며 인물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집의 위치와 귀신의 형태가 기기괴괴하여 그야말로 명부전이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저승의 명부전이 여기 있는 듯하구려."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그런데 명부전으로 끌려가거나 형틀에 묶여 곤장을 맞는 죄인들이 모두 머리 깎은 중들이어서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어찌 이런 그림을 그렸소?
죄인들이 모두 중이니 이를 어찌 하라는 것이오?
내가 절에 돌아가면 분명히 큰 낭패를 볼 터이니 당신이 내 일을 그르친 것이오."


중이 그림을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그림이 잘못되었소?”


김명국이 붓을 내던지면서 화를 냈다.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어찌 들을 죄인으로 만든 것이오?"

"그대들이 일생 동안 하는 일이 중생을 현혹하고 무지몽매한 백성을 기만하는 것이니 지옥으로 가야 할 자는 당연히 중들이 아니오?
악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악귀야."


김명국은 중이 사색이 되는 것을 보고 호탕하게 웃었다.

"이런 그림은 필요 없소.
내가 준 포목을 도로 내놓으시오."


중이 화가 나서 말했다.

무ㅖ 애쨰례궤~~~~~~


"포목은 내가 먹어 치워 뱃속에 있으니 도로 가져가려면 내 배를 째시오.
중이 살계를 범하는지 봅시다."


김명국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배를 내밀었다.

중은 아무 항변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대는 술이나 더 가져오시오.
술만 가져오면 내가 그림을 고쳐주리다."


중은 어쩔 수 없이 저자에 가서 술을 몇 말 사 왔고 김명국은 진종일 취하도록 술을 마신 뒤에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붓을 잡아 휘갈기기 시작했다.

그는 순식간에 깎은 머리에 머리카락을 붙이고 잿빛 승복에 채색을 하여 그림 속의 중들을 일반인으로 만들었다.

그림을 마치자 그는 또다시 술을 마셨다.

"당신은 과연 천하제일의 신필이오."

중은 그림을 보고 감탄하여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다.

김명국이 그린 명사도는 그림이 어찌나 세밀한지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처럼 음산하고 괴기스러웠다.

에도 시내를 지나가는 조선통신사 행렬 (羽川藤永 그림, 고베시립박물관)


김명국은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두 번이나 다녀왔다.

일본인은 조선의 그림을 좋아했는데 당시 조선의 사대부나 명성이 높은 예인들은 표면적으로 재물을 탐하는 것을 비루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그림을 일본인에게 팔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림을 그려주고 돈을 벌었는데 김명국이 두 번째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이 떠들썩하고 야단법석이 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통신사 임광은 그에게 그림을 얻기 위해 일본인이 찾아와 부탁을 하는 바람에 울려고까지 했다는 기록을 남겼으니, 김명국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김명국은 일본에 갈 때마다 금지하는 밀무역을 했는데, 결국 통신사에게 발각되어 벌을 받기도 했다.

일행을 검색할 때, 김명국의 삼(蔘)상자가 또 발각이 되었으니 밉살스러웠다.
역관 윤대선은 스스로 발각됨을 면하기 어려울 줄 알고서 손수 삼 자루(蔘橐)를 들고 와 자수하였으니, 딱하고 불쌍한 일이었다.


위는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된 임광의 병자일본일기(丙子日本日記)에 있는 기록이다.

수명을 다스리는 남극성을 사람에 빗대어 익살스럽게 그린 작품. 세세한 세상사를 초월하고자 한 작자의 자화상은 아닐까. <수성노인>, 김명국 작


한번은 일본인이 화려한 집을 짓고 사방 벽을 주옥으로 장식한 뒤에 김명국에게 천금을 바치며 그림을 그려달라고 청했는데 김명국은 술을 달라고 하여 대취한 뒤에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금가루를 입에 가득 물고는 벽에 뿜었다.

일본인이 깜짝 놀라 김명국을 죽이려고 들자 김명국은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린 뒤에 붓을 잡고 순식간에 그림을 그렸는데, 신묘한 경지에 이른 그림을 본 순간 일본인이 절을 하면서 감사해했다.

위의 사건 역시 <병자일본일기>에 있는 기록이다.

김명국은 자신의 그림에 나타난 호쾌한 필법처럼 성품 또한 거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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