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에서 해방된 것이
최대의 쾌사다
- 조선 최고의 무식 왕자 순평군 -
정치는 때때로 코미디를 연출한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는다.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단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면서 겉으로는 왕위를 사양하는 체했다.
수양대군 일파의 위협에 견디다 못한 단종이 양위를 하자 수양대군이 겉으로는 사양하는 체하면서 대보(大寶, 국새)를 받으려 한 것이다.
이에 옥새를 관리하던 예방승지 성삼문은 옥새를 안고 목을 놓아 통곡했다.
세조가 바야흐로 부복하여 겸양하는 태도를 취하다가 머리를 들어 성삼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어찌 단종의 양위에 이토록 슬퍼하느냐'
는 듯 차가운 눈빛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이 대목을 읽다 보면 역사의 순리에 씁쓸한 웃음만이 지어질 뿐이다.
태종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뒤에 왕의 자리를 둘째 형 방과에게 양보했다.
왕의 자리가 탐나서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게 아니라는 점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는데 권력을 가진 이방원에 의해 억지로 왕좌에 오른 정종은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사냥을 하면서 소일했다.
정종이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뒤 이방원에게 양위한 것은 자식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하다가 이방원에게 물려준 것이다.
왕의 자리에 욕심을 내면 동생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정종이 그토록 이방원을 두려워했는데 그의 아들들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정종은 본부인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해 적장자가 없었으나, 첩에게서 낳은 순평군을 비롯하여 몇몇 아들이 있었는데, 순평군은 당대 사람들이 모두 어리석은 인물이라고 평했다.
세종은 학문을 좋아했다.
세종 자신이 <소학(小學)>을 100번 이상 읽었다고 토로할 정도로 학구적이었는데 그는 종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종학(宗學, 왕실의 자제들이 공부하는 학교)을 열어 글을 가르치게 했다.
종학에 정종의 둘째 아들 순평군이 입학했는데, 그때 나이가 40세를 넘었다.
순평군은 일자무식이었다.
종학이 열리자 학관이 <효경(孝經)>을 강하기 시작했다.
학관은 '개종명의장제일(開宗名義章第一)'이라는 첫머리 일곱 자를 가르쳤다.
차례의 첫 번째를 가르친 것이다.
“내가 지금 늙고 둔해서 공부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첫머리 두 글자를 배우는 것으로 족하다.”
순평군은 <효경>의 차례 첫 번째 있는 두 글자만 공부하겠다고 말하고 종학을 나왔다.
마치 초등학교에 입학시키지 않으면 법으로 처벌받기 때문에 하루만 입학시켰다가 그만둔 일제강점기의 시골 사람과 같은 꼴이었다.
그는 '개종'이라는 두 글자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외웠다.
"너희도 '개종'을 잊지 말고 기억했다가 내가 곤란할 때를 대비하라."
순평군은 종들에게도 '개종'이라는 두 글자를 외우게 했는데 사람들은 그러한 순평군을 보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순평군은 이방원의 서슬이 퍼런 시대에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지 않고 늙어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살았다.
"죽고 사는 것이 하늘의 운수에 달린 것이라고 하지만 슬픈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다만 종학에서 해방된 것이 최대의 쾌사다"
위의 글은 순평군이 죽을 때 자식들을 모아놓고 한 말이다.
순평군의 유언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순평군이 공부하기 싫어하여 학교에서 해방된 것을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그렇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방원의 무서운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죽는 순간까지 어리석은 사람의 흉내를 냈을 뿐이다.
한나라 때의 명장 한신은 젊은 시절 부랑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 지나갔고, 대원군은 안동 김 씨 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갓집 개 흉내를 냈다.
현자가 어리석은 사람을 흉내 낼 때 범인은 현자를 비웃는다.
그러나 현자는 속으로 범인을 비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