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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 아워스(The H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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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비치(Bitch), 로라의 이야기, 
 
영화 디 아워스에서

여자와 남자?
 
여자들은 모든 방면에서 유능하고 뛰어난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평균치를 조금 웃도는 정도에 불과하고 여자의 능력은 일관성이 없고 불안정하다.
 
이같은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 보통의 남자보다 뛰어난 감성과 섬세함을 지녔음에도 정작 그 부분이 필요한 영역에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요리를 잘하지만 전문 요리사에는 대부분 미치지 못한다.

실제로 대부분 요리사는 남자들이다.
 
또 섬세한 미적 감각이 남자들 보다 우수하지만 대부분의 뛰어난 미술가는 남자들이다.
 
과거에 비해 남자의 영역과 여자의 영역의 경계와 구분이 모호해졌지만 여성의 미묘한 감성의 영역은 여전히 낯설고 신비스러운 미지의 영역이다.
 
여자들이 요리의 전문가가 되지 못하는 것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기분에 따라서 능력이 크게 좌우 되어 흔들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여자들에게서 위대한 예술가나 사상가가 나오지 못하는 것은 자궁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러한 미묘한 여성들의 감성을 아주 섬세한 감각으로 다룬 영화가 바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 아워스(The hours)이다.

영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용의 키 포인트도 아니고 배우도 제외하고 감독의 이야기를 들먹인 것응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섬세한 터치로 원작보다 더 나은 영화로 성공한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쉐필드를 배경으로한 촌 동네의 한 어린이가 발레리나로 성공한 이야기인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 2000)를 발표하면서 예사스런 눈을 가진 감독이 아니라 는 것을 이미 증명해 주었다.

디 아워스(The Hours), 각기 다른 시간들의 중첩된 여자들의 허무 이야기

1900년대 초와 1950년대, 그리고 2,000년대의 세 시간을 설정해 백년 간의 세 세대의 여성들의 사랑으로 이기지도 못하는 허무를 이 영화는 세 액자의 틀로 구성하고 있다.
 
첫 메시지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남긴 편지로 시작된다.

Dearest,
I feel certain, that I'm going mad again.

I think we can't go through another of these terrible times and I shan't recover this time.

I begin to hear voices and can't concentrate.

So I'm doing what seems the best thing to do.

You have given me the greatest possible happiness.

You have been in every way all that anyone could be.

I know that I'm spoiling your life and without me you could work and you will.

I know.

You see I can't even write this properly.
 
What I want to say is that I owe all the happiness of my life to you.
 
You have been entirely patient with me and incredibly good.

Everything is gone for me, but the certainty of your goodness.
 
I can't go on spoiling your life any longer.
 
I don't think two people could have been happier  than we have been.
 
Virignia.

그녀는 완벽한 남편의 보호와 사랑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남편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두 번째의 자살을 기도하고 마지막 세번째에 결국은
세상을 떠난다.

다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를 읽으며 완벽한 감정 이입의 상태에 있는 1951년 LA에 사는 로라(줄리안 무어)가 있다.
 
그녀도 역시 중산층의 안락한 가정에서 자기 생일날을 위해 스스로 꽃을 살 줄 아는 남편의 사랑과 보호 속에서 역시 아무런 문제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 척박한 시대와 고통스런 세상에서 살아 숨쉬는 것 자체로 혜택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더욱 부자 나라에서 먹고 살기 걱정없고 남편의 완벽한 보호와 사랑 속에서 살고 있는 이 두 여자에게 뿌리 깊은 허무란 정말 사치스러운 것으로 생각 되어 지기 쉽다.

허무에 대한 이해
 
우리는 이 한 편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하기 위하여 주제로 흐르고 있는 허무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허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다음 시를 한번 읽어 보도록 하자.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申庚林 1935- )의 시, 갈대

몸에서 흔들리는 갈대란 자신의 내부에서 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존재의 인식은 허무를 본질로 한다.

삶을 끌어 안으면 안을 수록 삶의 실체에 절망을 할 수 밖에 없다.

산다는 것은 사실상 슬픔을 동반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존재의 인식은 허무를 바탕으로 하고 다시 허무를 바탕으로 하여 존재의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존재를 인식하고 삶을 꺼내 놓고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결국은 가질 수 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다.
 
존재는 때로는 마치 깃털처럼 가볍기도 하고 때로는 납덩어리보다 무겁기도 한다.

결국 이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감정 속에서 교차되면서 혼란을 겪게 된다.
 
존재에 대한 인식은 억제할 수 없는 슬픔과 때로는 쓸쓸한 기쁨을 동반하기도 한다.

 
인간에게서 고독과 비애는 피할 수 없는 실존(實存)이다. 단지 이것을 끌어안고 사는 류형과 이것을  일부러 망각하고 사는 류형이 있을 뿐이다.

 디 아워스는 표면 상 세 개의 틀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이다.
 
그리고 궂이 섬세하게 가르자면 두 개의 중심 틀로 나눌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와 노라의 허무와 절망은 결국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버지니아는 그 절망과  참을 수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결국은 자살로서 마감한다.
 
그러나 로라는 자살과 삶이라는  두개 사이에서 첫번째로 자살을 시도하다 결국은 삶을 선택하는데, 현실을
버리고 새로운 삶 을 선택한다.

버지니아 울프도 어느 날 가출을 결행한다.
 
남편 몰래 기차역으로 가서 차표를 사가지고  기차를 기다리다 뒤 쫓아온 남편에게 발각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후에 세번 째의 자살을 시도한다.

로라는 예민한 아들 리차드를 이웃에게 맡기고 자살을 결행하려고 떠났다가 포기하고 다시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두번째 아이를 낳고 식구들을 나둔체로 캐나다로 떠나고 만다.

 세습된 로라의 허무와 절망은 아들에게


세개의 액자 구성으로 된 이야기에 메리린 스트립이 연기한 패트리샤로 표면상 연결이 된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패트리샤는 로라의 아들 리차드를 드러내기 위한 소도구로 쓰이고 있다.

로라의 절망과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겁게 느낀 존재에 대한 인식은 시인과 작가가 된 리차드에게 그대로 반영이 된다.
 
에이즈에 걸린 그는 이제 죽어가고 있다.
 
그는 자신이 오직 살아있는 것은 옛 애인인 패트리샤를 만족 시켜주기위한 것이 아닌가 말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꼭 건져 봐야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인식과 허무와 '사랑'과 역학 관계이다.

허무와  사랑이 어떤 상관 관계와 비중으로 삶에 영향을 미치는가?
 
결국은 여섯 사람, 버지니아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로라와 그녀의 남편, 리차드와 페트리샤에게 어떻게 미치게 되었는 가 하는 것이다.

패트리샤도 레즈비언으로 그녀의 여자 친구와 살고 있고 리차드 역시 에이즈에 결려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는 패트리샤가 보는 앞에서 5층에서 투신자살을 하고 만다.
 
'로라'의 선택

이 영화에서 숨겨진 키는 바로 '로라'의 선택이다. 
 
우리가 생각해 봐야할 것은 바로 이 로라의 선택이다.
 
그녀는 버지니아와 같은 병을 앓고 있었지만 자살을 하지 않고 자기의 온전한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삶을 선택하기 위해 자기의 모든 현실을 버린다.
 
패트리샤는 그런 그녀를 '몬스터'라고 한 마디로 말하고 있다.

어느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에 모든 것을 훌훌 버리고 떠난 그녀는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실상 악녀이고 비치(Bitch)이다.
 
그러나 그녀는 패트리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Later that night I made a plan.
 
The plan was I would leave my family when my second child was born.That's what I did.

I got up one morning, made breakfast...went to the bus stop, got on the bus.

 
I'd left a note.
 
I got a job in a libraryin Canada.'

이에 대해 패트리샤는 반발해 이렇게 너는 후회하고 있을 네 잘못을 마치 잘한 일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구나'라는 식으로 이렇게 말한다.
 
'It would be wonderful to say you regret it.'
 
다시 로라는 미소를 머금은 체 이렇게 말하고 있다.
 
But what does it mean?

What does it mean to regret when you have no choice.

It's what you can bare.

There it is...no one is going to forgive me.

It was death. I chose life.

결국은 로라는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한 것이다.
 
입센의 '인형의 집'의 로라가 떠오르는 것은 웬일인가? 어떤 윤리적 잣대로 그녀의 선택에 대해서 사실 우린 쉽게 잴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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