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조선시대의 욜로족 : 성현(成俔), 채수(蔡壽), 김이소(金履素) 조선 시대의 욜로족 좌충우돌 여행기 -포의망혜로 주유천하에 나선 삼총사들 채수와 성현은 조선 세조에서 중종 때까지 문신으로 활약한 인물로, 문장이 뛰어나 당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그들은 승지를 지내다가 파직되자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주유천하하기로 결정했다. 마음에 맞는 무인 이소와 함께 흰옷과 짧은 도롱이 차림에 각각 어린 종을 거느리고 관동지방을 향해 길을 떠났다. 마치 배낭여행을 떠나듯이 가벼운 차림으로 여행에 나선 것이다. 채수는 훗날 평안도관찰사를 지내고 중종반정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어 명성을 떨쳤으며, 성현은 《용재총화》를 짓는 등 두 사람 모두 문명을 날린 문신이다. 이소는 훗날 절충장군(折衝將軍, 정삼품 당상관 무관 벼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까지 오르는 등 전.. 더보기 총명했지만, 무식했던 순평군 수업에서 해방된 것이 최대의 쾌사다 - 조선 최고의 무식 왕자 순평군 - 정치는 때때로 코미디를 연출한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는다.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단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면서 겉으로는 왕위를 사양하는 체했다. 수양대군 일파의 위협에 견디다 못한 단종이 양위를 하자 수양대군이 겉으로는 사양하는 체하면서 대보(大寶, 국새)를 받으려 한 것이다. 이에 옥새를 관리하던 예방승지 성삼문은 옥새를 안고 목을 놓아 통곡했다. 세조가 바야흐로 부복하여 겸양하는 태도를 취하다가 머리를 들어 성삼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어찌 단종의 양위에 이토록 슬퍼하느냐' 는 듯 차가운 눈빛이었다. 의 이 대목을 읽다 보면 역사의 순리에 씁쓸한 웃음만이 지어질 뿐이다. 태.. 더보기 조선의 천재화가 김홍도 군자의 벗을 얻는데 2000냥쯤이야 - 매화를 사랑한 천재화가 김홍도 - 김홍도는 1745년 영조 21에 태어났으나 언제 죽었는지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많은 그림이 남아 있어 혜원 신윤복과 함께 조선의 천재화가로 불린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본격적인 문예부흥 시대로 접어든 영조 때는 많은 시인과 화가가 배출되었는데 기록에 남은 영조 시대의 화가만 60명이 넘을 정도로 많은 화가들이 활동했으며 그중에서도 김홍도는 어린 시절부터 독보적인 천재로 불렸다. 그는 풍도(풍채와 태도)가 아름답고 기상이 호쾌하여 신선과 같은 인물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김홍도의 집안은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어떤 연유인지 김홍도는 당시 문인화가로 널리 알려진 강세황(姜世晃)에게 어릴 때부터 그림을 배웠다. 강.. 더보기 조선의 개구장이 시인 정수동(鄭壽銅) 발목은 목이 아니던가 ㅡ 까칠한 아웃사이더 정수동 ㅡ 세상이 미쳤는데 근엄하면 무엇하리 陳狂見矣謹嚴休 천하에 이름을 감추고 술집에서 죽으리 只合藏名死酒樓 아이가 태어나서 우는 까닭을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兒生便哭君知不 한번 태어나면 온갖 시름 다 겪기 때문이라네 一落人間萬種愁 조선 말엽 평생을 술과 해학으로 살다가 죽은 여항 시인 정수동(鄭壽銅)의 시이다. 김삿갓이 조부 김익순을 비난하는 시를 지은 것을 비관하여 천하를 방랑한 시인이라면, 정수동은 출신의 벽에 가로막혀 익살과 조롱으로 한 세상을 풍자한 시인이다. 정수동은 일본어 역관 출신의 가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역관이 아니면 출세할 수 없었다. 부패와 비리가 극심한 철종 시대에 벼슬을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조선 말엽의 세상을 미친 세상으로 보았으나.. 더보기 어쩌라고 배째!! 조선의 취옹화사(醉翁畵師) 김명국 악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악귀다 ㅡ 취옹화사 김명국 ㅡ 조선 시대 가장 널리 이름이 알려지고 높이 평가받은 화가는 신필(神筆)로 불리는 김명국(金明國)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처럼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대중에게는 낯익은 이름이 아니다. 그의 그림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고 그밖에 더보기 유머를 알았던 충신 이항복 금강산도 동대문밖에 있다 ㅡ 조선의 입담 개그 마스터 이항복 ㅡ 조선 시대 500년 역사에서 이항복처럼 해학과 풍자가 뛰어난 인물도 드물다. 그는 선조와 광해군 때 가장 강직한 명신 가운데 한 사람이고, 학문이 뛰어난 당대의 지식인이었으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를 역임할 정도로 경륜이 높기도 했으나, 그가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촌철살인의 풍자와 해학 때문이다. 이항복은 1556년 명종 11 10월 한양의 북촌에서 태어났다. 고려말의 대문장가 이제현의 후손으로, 부친은 참찬 벼슬을 지낸 이몽량, 어머니는 결성 현감 최윤의 딸이다. 그는 태어나서 이틀 동안 젖을 빨지 못했고, 사흘 동안 울지도 않았다. 이에 아버지 이몽량은 아들이 걱정이 되어 소경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 했다. "걱정할 .. 더보기 조선 최고의 여장부 송씨 영의정 남편의 수염을 몽땅 뽑고 당당히 사약을 받다 - 조선 최고의 여장부 송씨 - 조선 시대 여성이 가장 고통을 받은 것은 일부다처제에서 비롯된 축첩의 문제였다. 얼굴도 보지 못하고 부모의 결정에 따라 혼례를 올린 뒤 막상 정을 붙이고 살려니까 남편은 이런저런 이유로 첩을 들이고, 집 안에서 거느리는 여종까지 친압(親押, 겁탈)하여 성의 노리개로 삼았다. 그러나 여자는 항의도, 반발도 할 수 없었는데 투기를 하면 칠거지악이라고 하여 시집에서 쫓아내니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인내해야 했다. 여자를 꽁꽁 묶은 올가미는 칠거지악 외에도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삼종지도가 있었지만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조선의 뭇여성들이 축첩 문제로 고통 받을 때 당당하게 여성의.. 더보기 이전 1 ··· 72 73 74 75 다음